History

조선의 왕 태조(이성계) 인물의 대해서

useful1986 2023. 9. 11. 11:00

태조(이성계) 출생과 재위년도

태조(1335년 11월4일~ 1408년 6월 27일)는 고려 말 무신이자 정치가이며,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1392년 8월 13일~ 1398년 10월 22일)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개요

고려와 조선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조선의 개국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활발은 특히 두드러져, 황산대첩에서는 아기발도라는 왜구 소년장과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성계는 아기발도의 투구 꼭지를 화살로 맞추어 투구를 벗겨냈으며, 황상과의 대결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황상은 원나라 순제 앞에서도 최강의 활쏘기를 자랑하며, 대결 결과는 50발 이내에서는 두 사람이 둘로 지지 않았지만 50발을 넘어가자 황상의 활이 빗나가는 장면이 벌어지며 이성계가 승리하였습니다. 이성계의 뛰어난 활쏘기는 그의 영웅적인 업적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태조(이성계)유년기시절

이성계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용모와 영웅적인 기질을 지녔습니다. 몸은 예민하였고, 뛰어난 전략 지식과 용맹은 어릴 때 부터 두드러졌습니다. 화룡에서 자라며 북방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매를 얻고자 희망했던 어린 시적을 보냈습니다. 고려 무신 일족의 후예로서 말을 타고 활을 잘 쏘며 '신궁'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명수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30년간 전장에서 패한 적이 없었으며, 대전과 군인 역할로 은회한 뒤 자신의 아들과의 '조사의 난'에서만 패배한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전쟁에 나갈때 나를 부르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용맹과 전쟁 기술은 전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생애

1356년, 이성계는 유인우가 이끄는 고려군과 함께 원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면서 등장합니다. 그때 공민왕은 조씨와 이씨에게 조상의 죄를 벗을 기회를 주기 위해 공민왕에게 투항하고,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공을 세웁니다.

1381년,홍건적의 침입을 평정하고, 다시 홍건적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영내로 침입할 때, 이성계는 2,000명의 강력한 친병 조직을 이끌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여합니다. 그의 군대는 대부분 기병으로 이뤄져 있어 뛰어난 전투 능력을 갖췄습니다.

1362년, 원장 나하추가 함경도 홍원지방으로 침입할 때, 이성계는 고려군을 동북면 병마사로 삼아 적을 만고 함흥평야에서 원군을 격퇴시켜 명성을 쌓습니다.

1364년, 원나라 기황후의 공격을 저지하고 덕흥군을 세우려는 원장의 침입을 막고 국토를 확장하기 위해 원장에 나가게 됩니다. 이성계는 이러한 활약을 통해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참여하고, 그의 용맹과 군사적 재능은 적들과 싸움에서도 빛을 발하며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요동정벌 반대와 위화도 회군

 

1388년(무왕 14년) 2월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을 영유하게 됩니다. 원래는 원나라 쌍성장군이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원나라의 뒤를 이은 명나라 땅입니다. 이후 철령위라는 관아가 설치되고 관리들이 파견되었습니다.
1388년 4월 최영과 우왕은 이번 기회에 요동을 공격하여 명나라의 야망을 깨뜨릴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정복에 반대하며 네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1.작은 나라(큰 나라를 공격하는 소국)로서의 대국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2.여름 성수기에 군대를 동원합니다.
3.일본 해적들이 전군을 동원해 북진 중 틈을 노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4.곧 여름이라 비가 많이 오니까 접착제가 녹고 활이 녹아서 병사들은 병에 걸릴 거예요.

위화도 회군은 한반도 고려국 말기 1388년(우왕 14) 음력 5월 요동 정벌을 위해 군을 이끌고 압록강 하류 위화도까지 이른 우군 도통사 이성계가 개경으로 회군한 사건을 말한다.

 

토지 개혁과 과전법을 시행

이성계는 고려시대에 있던 사회적 양극화와 기득권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전면적인 개혁에 나섰습니다. 대농장 소유와 불법으로 인한 국고 고갈을 해결하기 위해 귀족 기득권과 불교사찰을 상대로 개혁을 추진했으며, 신전을 폐지하여 사회 혼란을 해소하고 중앙집권, 관료제, 토지소유 관계의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신진 사대부들과 기존 귀족 사이에서 개혁 방향을 둘러싼 분열이 있었으며, 특히 전제개혁에 대한 입장에서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정몽주는 중립을 유지하면서도 개혁을 지지했으나, 일부 사대부들은 사전 폐지에 반대하고 일전일주론을 주장했습니다. 결국, 이성계는 조준에게 과전법을 제정하여 토지개혁을 진행있으며, 이 과정에서 귀족들의 저항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토지 개혁은 고려 권문세족에서 신진사대부로의 이동을 목표로 했으나, 농민들에게 땅을 직접 나눠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결함 중 하나는 이성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귀족들과 농장주들의 반대와 저항이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 시대의 정치적 갈등과 변화의 근본적인 요인 중 하나가 토지개혁이였습니다.

 

 

 

역성혁명파의 유배와 정몽주의 최후

1392년, 정몽주의 영향력 감소로 이성계 일파가 대세, 역성혁명 진행, 공양왕 폐위, 이성계 왕으로 추대 민개가 남은을 죽이려 하나 태조는 의리 상 민개를 살렸다.

 

선양 형식으로 조선 개국

1392년 7월 17일, 이성계(태조)는 고려왕종의 종말과 함께 조선왕조를 창건하게 되었습니다. 이성계는 공양왕의 폐위와 옹위를 받아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를 결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비 안씨를 찾아가 교지를 요청하고 그를 수용함으로써 조선왕조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초기에는 이성계는 고려왕조의 국호를 그대로 "고려"로 유지했지만, 1393년 3월 27일에 국호를 "조선"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이후, 명나라에 대한 사신을 보내 책봉을 요청했으나 명나라 홍무제는 이를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챙을 부여했습니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태조 이성계의 지도 아래 고려왕조를 대체하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포용 정책과 고려 구신들의 출사

태조는 개국 이후에 56명의 세력 중 8명을 제외한 나머지 48명 중 32명을 태조, 정종, 태종 대에 다시 출사시켰으며, 고려 구신들을 원종공신으로 포상하거나 관직에 임명하여 새로운 왕조의 안정과 문물 정비에 기여하였다.

 

 

한양 천도와 조선 선포

태조는 천도를 결정할 때, 한양(서울)을 선택한 이유는 조운이 잘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고, 이 과정에서 정궁터로는 하륜의 제안으로 현대의 신촌 지역을, 정도전의 제안으로 경복궁 터를 선택하여 이들의 견해가 채택되었습니다. 태조는 종묘, 사직, 법궁을 비롯한 도시 계획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한양으로 천도

태조(1392년-1398년)는 10월에 문무백관 2명씩만을 남기고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왔으며, 한양을 새로운 수도로 지정하고 도성을 건설하여 국가의 새로운 모습을 형성했다. 재위 4년때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여 성을 쌓기 위한 기초측량을 시작하고 정도전을 총책임자로 임명하였으며, 한양 성곽은 태조 5년에 시작하여 1년만에 완성되었다.

 

제도 정비와 법전 편찬 등 국가 기틀 수립

정부 시설 개선과 국가 서적 편찬을 통해 국가를 강화하였으며, 정치체제를 도평의사사에서 공신들과 관료들의 합좌 기구를 변화시켜 국왕의 권력을 강화했다. 도한 내재추의 권력을 제한하고 기존 사회제도를 유지하였다.

 

묘호 및 시호

조선의 개국자로, 광무 원년에 고종에 의해 개국시조로 고황제로 추존되었으며, 명에서 내린 '강헌' 시호를 삭제하고 새로운 시호를 받았다.

능원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태조는 처음에 신덕왕후의 무덤을 함흥에 안장하려 했지만, 그의 아들인 태종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으로 안장되었습니다. 이때, 태종은 신덕왕후의 무덤을 훼철하여 광통교 교량 건설에 사용하고, 그녀를 후궁으로 격하시켰습니다. 태조는 자신을 함흥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태종은 자신을 한양 근교 양주에 묻기로 결정하고 함흥의 토지와 억새풀로 그의 무덤을 덮었습니다. 이로써 선덕왕후의 무덤은 처음 계획한 곳이 아니라 다른 장소에 안장되고, 그녀의 무덤이 부식되는 일도 발생하였습니다.

 

왕씨 몰살

고려 태조의 아들들 사이에서 신덕왕후 소생과 신의왕후 소생 사이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방원은 신덕왕후 소생으로, 왕위와 권력을 둘러싼 갈등에서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태조는 정도전을 통해 왕자들의 군사 권력을 제한하고 중앙 집중화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원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조작된 명분을 내세워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킴으로써 정도전과 다른 왕자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탈환하려 했습니다. 

 

화룡사 전설

태종은 1401년에 함흥에서 은거한 태조를 양주로 부러내기 위해 무학대사를 보냈으나 태조와의 면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의 장소가 회룡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1398년에는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학대사를 만나며, 이곳에서 몇 일 동안 머무르고 절을 짓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회룡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으며, 이에 관한 전설은 1881년 승려 우송의 '회룡사중창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최영과의 비교

이성계와 최영은 조선 초기의 두 강력한 인물로, 이성계는 신흥 무인 세력의 대표이며 최영은 권문 세족과 관련된 가문 출신으로 구 세력의 대표였습니다. 이성계는 조상들의 원나라와의 협력과 충성을 벗어나 신진대부들과 협력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최영은 고려 정통 귀족 가문 출신으로 이성계와 대조되며 국왕 태조에 의해 칭호를 받고 그의 가족도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최영은 희생과 이성계의 혁신은 조선 초기 역사의 두 가지 대표적인 전설로 남았습니다.

 

장수군도

이성계, 심덕부, 이지란은 의형제 관계를 형성하며 회군 결의를 한 장수군도 문서가 새롭게 발견되었습니다. 

 

함흥차사

태종이 태조를 환궁시키려고 함흥차사를 보냈지만, 태조가 차사들을 활로 죽였다는 이야기로 인해 "함흥차사"라는 용어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후대 야사로 여겨지며, 실제로는 조사의 난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태위

태조는 어린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왕세제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1400년에는 왕위 계승을 놓고 다른 아들들인 방간과 방원 간에 대립이 발생하여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태조의 증손자인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태종은 즉위 후, 태조를 서울로 데려오기 위해 성석린을 보냈지만, 이성계는 자신을 폐위시킨 이방원을 증오하며 함경도로 돌아가 태종의 요청을 무시했습니다. 태종은 이성계를 되돌려보내려 했지만, 이성계는 차사들을 활과 화살로 공격하여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함흥차사'라는 별명이 생겨났습니다. 이후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과의 갈등에서 실패한 '조사의 난'을 일으켜 이방원을 때렸으나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태조의 증손자인 '원경왕후 민씨'의 노력으로 이방원을 서울로 되돌려왔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 태조는 고요한 생활을 이어가면서 태상왕으로 7년을 지내다가 1408년 중풍으로 별세하였습니다.